기획자로서,

완벽하지 않아도 돼요.

Sebspark 2020. 11. 15. 16:53

건강부터 챙기세요. 건강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어요. 💪


느닷없이 찾아온 불청객

2018년 차가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가까워질 즈음, 여느 때와 같이 업무를 위해 엑셀 시트를 위아래로 스크롤하며 관련 데이터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우스로 스크롤할 때마다 셀이 이어진 수직의 선이 파도치듯 구불구불한 움직임을 보입니다. 처음에는 모니터가 이상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주변 동료들의 모니터를 보아도 같았습니다. 단지 피곤한 나머지 일시적인 건가보다 했습니다. 하루는 안 그랬다가 또 하루는 다시 엑셀 시트가 구불 거려 보입니다. 심지어 종이 책을 읽을 때에도 시각적으로 집중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도무지 글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증상은 점점 심해졌고, 주변 안과를 거쳐 대학병원까지 내원하여 받게 된 검사 결과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망막 주변에 존재해서는 안될 나쁜 혈관들로 인해 황반변성이 일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암슬러 격자 테스트 (나의 경우 B~C 사이까지 진행됐었다.) / 사진 = 강동경희대병원

 

원인은 있다.

'몸이 천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이 아프게 된 이후로,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몸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일주일에 대부분을 보내는 회사에서 조차 온전히 업무를 할 수 없었습니다. 또릿하게 보이지도 않고 집중 자체가 안되니까요. 더 이상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가 무섭게 엄습해왔습니다.

 

대체 내게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한없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동안 나름대로 건강을 위해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흡연도 하지 않고 음주도 그리 즐겨하지 않는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닥쳤는지요. 대학병원 교수님 조차 명쾌한 원인을 말씀해주시지 못합니다. 유전, 혈압, 당뇨, 스트레스 등..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알 수 있는 말씀만 하십니다. 유전자 검사도 했지만 이상소견이 없었고, 혈압도 정상, 당수 치도 정상. 더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무슨 일이든 '원인'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물론 의학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저는 저를 괴롭히는 이 것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습니다. 바로 '일'이었습니다.

 

사소한 집착

당시의 저는 기획자로서 첫 임무를 마치고 초기 제품 운영을 하며 업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첫 제품이다 보니 부족한 부분도 많았고, 심지어 저는 그것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왜 그리 사소한 것들에 집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주변에서 한 마디 하면 왜 그렇게 집착스럽게도 신경이 쓰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제품 유저가 차라리 일면식도 없는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나마 좀 덜했겠지만, 평소 연락하고 지내는 선후배들과 지점 동료들에게 좋지 않은 피드백을 듣거나 불만 섞인 목소리를 전해 들으니 너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 정도 즈음되니까, 메신저 알림이라던지 휴대전화 진동소리만 울려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습니다. 쿵쾅쿵쾅 하는 그때의 그 리듬을 잊을 수 없습니다.(그때의 잊을 수 없는 그 리듬이 이제는 나의 위험신호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리고 뒷 목의 빳빳함이 수시로 느껴졌습니다. 무언가 몸 안에 순환이 정상적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미 나의 몸은 사소한 집착과 과도한 책임감으로 인해 점차 망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경험이 없다 보니 모든 것이 커다란 망치와 같았고, 증상이 터지기 전까지는 내 몸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못했던 그런 날들이었습니다.

 

~ 하되, ~ 할 것.

최초 진단 이후 안구에 직접 놓는 4~5회의 주사치료를 통해 망막 주변의 신생혈관들은 모두 제거되었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 1년이 넘게 증상이 재발하지 않은 상태로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작은 후유증은 남았지만, 다른 이들과 같이 일을 할 수 있고 일상을 누릴 수 있음에 너무 감사합니다.

 

2018년 9월 29일, 망막에 물이빠졌다는 것 자체만으로 감사했던 하루를 기록한 인스타 피드

이후로 '일'이라는 것에 조금은 초연해지기로 했습니다. 사소한 것들은 조금 놓되, 중요한 것들은 집중할 것. 일에 대한 '나의 태도'는 유지하되, 내가 망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기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 때 좋지 않았던 지난 경험을 통해 갖추어진 새로운 마인드셋은 일과 나의 삶의 밸런스를 조금 더 안정감 있게 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 게 이 세상이니까요. 가끔 씩 나의 멘탈을 뒤 흔드는 일은 불현듯 찾아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하지만 저는 나의 건강, 나를 위해 조금씩 쉬어갈 수 있도록 크게 심호흡할 수 있는 사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일이라는 게 뭐든 완벽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나는 완벽하지 않은 사람인데, 완벽한 무언가가 떡 하니 나올 것이라는 생각부터가 약간은 모순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과 책임을 다 했다면, 당장은 부족하더라도 더 좋아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모든 이들이 완벽한 성공적인 제품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A부터 Z까지 완벽한 제품은 없습니다. 그저 발전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도전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계속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내가 아프지 않고 건강할 때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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